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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스폐셜 '용서,...' TV시청 후기[2]

교육홍보 2008-12-30 조회  2387

언젠가 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살인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 존치론자가 되고,
사형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 폐지론자가 된다는 것.

누군가 나에게
'사형이라는 것이 진정 인류에게 필요한 최선의 선택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아니,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자신과는 무관하고,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않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되는 패악을 저지르는 행위.
살인.

이 세상 어떤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나 역시 범죄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살인의 피해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늘 담아놓은 채 살아가고 있을까.

어두운 스크린 너머 악마의 얼굴을 한 살인자가 망치를 휘두르며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를 팝콘을 씹으며 심각하게 바라보다 피 튀기는 장면에서 으악, 소리 한번 질러주면 바로 잊혀지는 그런 순간.
모두에게 '살인'이란 아무리 심각하게 여겨봤자
이 정도의 시각으로 밖에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니까.

타인의 불행을 강 건너 불구경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제삼자에게 어쩌면 '용서'라는 것은 너무도 가당치 않은 머나먼 이야기, 혹은 정신나간 사람의 노망 정도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사소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서운함조차도 용서하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인 이 세상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남의 불행을 진심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여
그 사람이 나쁘고 양심 없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이고
내가 피해자, 혹은 그 가족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누구도 상상할 수 없고 또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일테니 말이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에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잃은
피해자 가족 고정원씨가 울면서 하소연을 했던 것처럼
결국 그 아픔과 상처는 온전히 피해자 가족인 자신만의 것.
하늘이 자신에게 안겨다 준 이 엄청난 시련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오로지 나 홀로 쓸쓸히 치뤄나가야 하는 전쟁 같은 일.

용서를 결심한 후, 이 '용서'라는 엄청난 마음의 의식을 행하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은 어둠을 헤매고 있고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울분을 토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죽음, 그 경계에 오롯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용서'의 의미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용서는 늘 그 자리에 있다.
다만, 그 용서를 택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용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고요히 존재한다.
결국 고정원씨는 용서를 택하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택한다.

반면, 끝내 용서를 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고정원씨의 딸들, 그리고 유영철에게 살해당한 다른 피해자의 가족 안재삼씨의 경우가 바로 그런 예다. 그들은 끝끝내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할 수 없고 그렇기에 하루하루 분노를 키우며 그 분노의 힘으로 아슬아슬한 자신의 삶을 지탱해나간다.

안재삼씨는 하루빨리 유영철이 처형을 당한다면 그때는 자신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안재삼씨의 아버지인 안노인은 아들과는 반대로 유영철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용서를 함으로써 당신 마음의 짐을 덜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이 극단적인 두 가지의 예는 사건 밖의 타인에 불과한 보통의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과 의문을 던져준다.

때로 삶은 너무도 치열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할 때가 있다.
이렇게 잔잔하고 수심 없이 푸르기만 한 이 하늘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와 반대로 상처입고 고통을 받고 절망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생의 진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도처에 처절하게 널려 있는가.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고정원씨가 떠난 '희망여행'에서 만나게 된 살인 피해자 가족들은 모두 각자의 상처를 공유하며 용서를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삶과 희망의 빛을 열어간다.
설사 용서의 길을 택했다 해도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시작'일 뿐일 것이다. 앞으로 가야 할 험난한 가시밭길에서 고정원씨를 비롯한 희망여행 참가자들은 또다시 좌절하고, 신을 원망하며 다시 방황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번 선택한 용서의 길에서 얻은 희망의 빛은 결코 그들을 배반하지 않으리라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빛 속에 바로, 참다운 삶의 의미가 담겨져 있으리라는 것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한다.
미친 것 아니냐고,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고.
혹은,내가 편해지자고 하는 용서가 진정한 용서냐고.
고정원씨의 용서를 '진짜 용서'냐 말할 수 있느냐고
그것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한 방편, 혹은 변명에 지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편안함을 위한 용서면 어떻고,
변명에 지나지 않는 용서면 또 어떠한가.

용서, 그 간단하면서도 짧은 이 한마디.
일상생활에서조차 쉽게 행하기 힘든 이 한마디의 의미를 어떻게해서든 실천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그 사람이 살아갈 앞으로의 삶의 길은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노하는 마음이야 당연하고
미워하는 마음 또한 이해하지만,
그 분노와 미움을 뛰어넘어 용서의 길을 들어섰을 때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면
아마 다큐의 제목처럼 정말
용서의 그 먼 길 끝에 그동안 꼭꼭 묻어둔 채 살아왔던
진짜 나의 인생, 진정한 '나'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아픔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의 시건방진 소리일 수도 있고 그들의 상처의 단 1퍼센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잘난척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심으로 피해자 가족들이 다시 새로운 삶을, 희망의 길을 되찾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짊어진 채 십자가의 죽음을 택한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삶에서의 용서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죽음 바깥에서는 용서도 희망도 없기에
우리들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이 순간 용서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여기에서 처음에 언급했던 그 질문의 대답.
그 대답을 이제는 확실하게 할 수 있을까.
정답은 여전히 모르겠다,이다.
나는 다큐의 한 시청자의 입장일 뿐이고 결코 고정원씨의 입장은 되지 못하기에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경악할만한 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괜히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정부를 원망할 때가 많다.
그것은 나 역시, 그리고 우리들 모두 살아가면서 스스로 해답을 얻어야하지 않을까.
진정한 해답은 아마도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그 길의 끝'에 존재할 것이다.

- 살인자들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 분들. 그분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이 글은 [날고 싶은 소망을 가진 그녀 _ 벨라돈나]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원문은 [http://blog.naver.com/jqwe111/130039815629]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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