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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가톨릭 쉼터] 25년 만에 출소 민들레국수집서 봉사하는 박용기씨

홍보부 2015-07-15 조회  1101

[가톨릭 쉼터] 25년 만에 출소 민들레국수집서 봉사하는 박용기씨

“기도·봉사 안에서 ‘사람답게 사는 기쁨’ 배워 갑니다”
1980년대 인천 일대서 조폭 생활
29세에 수감… 세례 받고 모범수로
서영남 대표 가족과 20년 인연 맺어
영치금 등 전 재산 노숙인 돕기에
“필리핀서 봉사활동 꿈이에요”
발행일 : 2015-07-12 [제2952호, 7면]

 ▲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대표(오른쪽) 옆에서 접시를 닦고 있는 박용기씨.
2015년 3월 필리핀/천안교도소

지난 3월 1일 필리핀에 있던 민들레국수집 서영남(베드로·61) 대표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법무부로부터 온 것이었다. 

천안교도소에서 감호처분을 받고 있는 박용기(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54)씨가 다음날 가출소한다는 통지였다. 3·1절 특사였다. 

청송교도소에서 24년을 복역한 박씨는 지난해 8월 천안교도소로 이감돼 모범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기대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서 대표와 아내 강 베로니카(57)씨는 필리핀 민들레국수집을 돌보던 상황이어서 인천 화수동 민들레국수집 일을 맡고 있던 딸 서희(모니카)씨에게 급히 소식을 전했다. 서희씨는 두부를 싸들고 천안교도소로 ‘용기 삼촌’을 마중 나갔다. 육중한 교도소 문을 나선 박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두부를 먹었다. 

25년 수감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교도소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에도 쏟아지는 눈물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랜 기억

‘박용기’. 1980년대 인천 일대에서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조폭’이었다. 1990년 8월, 29살 나이에 20년 6개월 징역형을 받고 청송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2011년 3월 형기를 마쳤지만 6년의 감호처분이 이어졌다. 

1995년 5월 22일, 그는 교도소에서 세례를 받고 모범수로 거듭났다.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기에 세례 받은 날짜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박씨와 서 대표가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 박씨의 세례 대부를 섰던 교도관이 서 대표에게 “1만 명 중에 1명 나올 것 같은 재소자가 있으니 한 번 만나보라”고 해 첫 만남이 이뤄졌다. 이후 20년 동안 서 대표 가족은 매달 한두 차례 박씨를 찾아가 함께 기도하고 영치금과 필요한 물품을 넣어줬다. 박씨는 서 대표 가족을 만나면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다짐을 돌에 새기듯 가슴에 간직했다. 

2000년 서울에서 출소자의 집인 ‘평화의 집’을 운영하던 서 대표. 그는 2001년 인천에 ‘겨자씨의 집’을 열고 출소자들의 사회적응을 도우면서 박씨의 방도 마련해 놓았다. 

“교도소 딱딱한 바닥에서 자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 방은 넓지는 않아도 호텔보다도 좋습니다.” 박씨의 ‘자랑’이 이어진다. 

서 대표가 교도소에서 만난 수많은 재소자들은 하나같이 소중한 형제들이지만 박씨는 각별했다. 그를 하루라도 빨리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한 서 대표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그간 관계기관에 보낸 탄원서와 신원보증서 등은 수를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민들레처럼

가출소 하자마자 겨자씨의 집에 새로운 삶의 보따리를 푼 박씨는 당연한 듯 민들레국수집 봉사에 나섰다. 요리부터 설거지, 청소까지 민들레국수집 ‘총지배인’이나 다름없다. 

그가 최근 ‘민들레희망센터’ 개소를 위해 자신에게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300만 원을 내놓았다.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는 민들레희망센터는 서 대표 부부의 오랜 꿈이었다. 센터가 들어설 대지 149㎡(45평) 넓이의 2층 건물 잔금은 그렇게 어렵사리 치렀다. 리모델링 비용을 아끼기 위해 민들레국수집 가족들과 박씨가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액수일지 모르지만 출소한 지 4개월밖에 안 되는 그에게는 거액이었다. 더구나 그 돈은 박씨가 교도소에서 일해 받은 ‘작업상여금’을 모은 것. 그것도 “저축해 놓은 작업상여금을 전부 내놓겠다”는 박씨를 말린 결과다. 그는 수감생활 중에도 영치금으로 받은 돈을 쓰지 않고 민들레국수집에 후원금으로 다시 내놓았다. 옷가지와 생활용품도 생기는 족족 “교도소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며 전부 나눠줬다. 

준비된 취사반장

2012년부터 청송교도소 취사반장을 자원했다. 새벽 4시 전에 일어나야 하는 고된 자리다. ‘고참’인 박씨가 맡을 이유는 없었지만 출소 후 민들레국수집에서 봉사하려면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기쁘게 임했다. 취사반장으로 일해 받은 작업상여금도 고스란히 민들레희망센터 개소에 밑거름이 됐다. 

매일 오전 6시면 일어나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6시50분이면 어김없이 민들레국수집에 나와 노숙인 식사를 준비하는 그는 ‘메르스’가 한창일 때도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메르스가 전국을 휩쓸면서 수도권 무료급식소 대부분이 문을 닫았지만 민들레국수집은 오갈 데 없는 노숙인들을 변함없이 최고의 손님으로 모셨다. 그러다보니 하루 700명 가까운 노숙인들이 민들레국수집에 몰리며 홀로 두세 사람 몫을 감당해야 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쁩니다.” 

오래된 꿈

그에게는 꿈이 있다. 3년 동안 인천 화수동 민들레국수집에서 봉사한 후 서 대표가 필리핀에서 운영하는 필리핀 민들레국수집을 돕는 일이다. 화수동 민들레국수집 봉사는 그 꿈을 이루는 첫 발걸음인지도 모른다. 

“서 대표님, 베로니카 누님…, 돌아보면 제 주위엔 늘 은인들이 계셨습니다. 이런 분들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 지 모릅니다.”

오래도록 품어온 꿈을 풀어놓는 그의 얼굴에서 싱그러운 바람이 이는 듯했다.


 ▲ 박용기씨가 7월 4일 민들레국수집 봉사 중 쉬는 시간에 묵주기도를 봉헌하고 있다. 
 ▲ 서영남 대표, 박용기씨, 강 베로니카씨, 딸 서희씨(왼쪽부터)가 출소자들의 보금자리 ‘겨자씨의 집’ 앞에서 함께 했다. 
 ▲ 민들레국수집을 찾은 노숙인에게 배식 중인 박용기씨. 요리·배식·설거지 등 민들레국수집의 ‘총지배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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