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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

홍보부 2015-03-16 조회  2700

기획특집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 




절대자를 찾아서



판사의 삶에 그리스도 신앙인의 모습을 새겨 넣듯이 살다 간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 그가 간절하게 절대자를 찾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푸르르!’ 이른 아침 공기를 뚫고 모악산 줄기를 따라 내려간 원평 마을 산 어귀에서 꿩이 날아오른다. 동네는 아직 아침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산 중턱 솔숲에서 인기척이 난다. 한 아이가 엎드린 채 두 손을 모아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 제발 제 꼬마 친구를 다시 살려주세요!”

열두 살 김홍섭이 눈을 꼭 감은 채 산중의 추위를 견디며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옆집에 살던 꼬마를 위한 것이었다. 바로 전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하였다.

“홍섭아, 전씨네 꼬맹이 아들이 죽었다는구나.”

옆집에 달려가 보니 어른들이 포대기에 싼 무언가를 작은 관에 넣고 있었다. 형제가 없이 자란 그에게 친동생 같은 아이였다. 홍섭은 그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보자, 고모가 늘 해준 말이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분이야. 우리는 열심히 기도로 청하기만 하면 된다. 그분 힘으론 안 되는 게 없단다.”

김홍섭은 한 달 내내 산에 올라가 기도로 청했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내 정성이 부족해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 것일까?’ 신을 원망하지 않았어도 가슴 한 켠에 의문 부호를 품게 되었다.

‘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은 그 전에도 있었다. 여섯 살쯤이었을 때 외삼촌이 병으로 오래 앓다가 죽었을 때였다. 자신을 귀여워해주던 외삼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어린 홍섭은 안타까웠다.

 

일제 강점기에 유년기를 보낸 김홍섭은 보통학교 입학 전 이른 나이에 개신교 신앙을 접하기 시작했다.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다. 집과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었던 금산교회는 인근에서 널리 알려진 예배당이었다. 지역 유지인 조덕삼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1905년 자신의 과수원에 터를 잡아 지어올린 이 교회는 일명 ‘ㄱ’자 교회로 유명했다. 김홍섭의 고모는 이 교회 장로 집안에 출가한 후 친정 식구들을 교회로 전도하는 데 열심이었다. 특히 어린 조카 홍섭의 손을 잡고 새벽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신앙 분위기와 진지한 성격이 합해져 김홍섭은 자라면서 인간 본질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다. 열심히 탐구하다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느 날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반대로 의혹은 깊어만 갔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가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죽는다,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혼불멸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유한한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면서 영원을 향한 김홍섭의 갈망은 뜨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개신교 신앙에서 적절한 대답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홍섭은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열심히 믿지도 못하지만 그냥 내치기도 어려운 어정쩡한 상태의 신앙생활 속에 청년 김홍섭의 암중모색이 시작되었다. ‘새 신을 얻기까지 옛 신발을 버리지 말자’는 격언을 변명 삼아 좌고우면했다.

하지만 스무 살 언저리에 결국 김홍섭은 개신교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것을 김홍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개신교 전반에 걸친 자의적인 성경 해석이나 목사의 무책임한 설교, 그리고 신도들의 자기 편의에 따른 기도 내용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으면 구원이라는 개신교의 주장은 무엇 하나라도 불합리하고 타당성이 결여된 것에는 마음을 두지 못하는 김홍섭에게 위안을 안겨주지 못했던 것이다.

개신교를 떠난 후 김홍섭은 불교를 향했다. 전에는 눈길을 주지 않던 사찰을 드나들면서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이 시절 그는 스스로에게 ‘자유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불교는 김홍섭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인간의 구제에 대한 불교의 염원은 높고 거룩해 보였고, 중생 모두의 성불을 도모하고자 하는 교의는 참으로 평등한 것이라 여겨졌다. 무엇보다 성심성의껏 계율을 지키며 수행해 나가는 불자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높은 진리를 얻으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수행자, 곧 모든 종교의 신도들이 지녀야 할  마땅한 도리가 아닌가.

불교에서 진리의 그림자를 얼핏 찾아낸 듯한 김홍섭은 그 근원을 캐보고 싶었다. 전국의 고찰을 다니며 산중 거사들을 만나 법문을 듣고 불설을 나누었다. 잡다한 세속의 고뇌를 떨쳐버리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불도를 닦는 그들의 모습에 자기 모습을 겹쳐보기도 했다. 서른 살 되던 어느 날, 김홍섭은 노사(老師) 방한암을 찾아갔다. 석가가 세속을 떠나 출가한 시기가 서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산중출가’의 꿈을 가슴에 품어 보았다.   

그러나 세속의 시간표는 그의 마음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조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었고 그는 어느새 결혼하여 자식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출가’는 한때의 상념으로 밀쳐 버리고 보통 사람들이 가는 삶의 여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새롭게 태어난 나라의 사법부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판사의 삶을 시작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자족한 삶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홍섭은 늘 목이 말랐다. ‘생이란 무엇이며,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던 아이가 어른이 되었지만 그를 감돌던 고뇌의 핵심은 여전히 삶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었다.    

김홍섭은 서른 중반에 6·25전쟁을 겪었다. 전쟁은 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납북된 친구의 생사는 알 수 없었고 시시각각 변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경험을 하며 김홍섭은 인생에 대한 의문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부산 피란지에서 판사 김홍섭은 자신이 걸어온 종교 순례의 과정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진짜 하느님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 무렵 그의 머릿속에는 ‘가톨릭’이란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이전에 가톨릭을 전혀 몰랐던 건 아니었다. 개신교 시절부터 알아왔지만 부정적인 의미였을 뿐이다.

‘마리아를 공경하고 교황의 지배를 받으며 유다교의 한 지파인 종교’가 그가 알고 있었던 가톨릭이었다. 어불성설처럼 들렸다. 하지만 개신교에 대한 미련을 버렸고 불교에서도 완전한 답을 구하지 못하던 김홍섭은 이제 ‘천주의 존재’와 ‘영혼 불멸’을 전제하고 영혼 구원을 위한 실천을 강조하는 가톨릭에 끌리는 자신을 정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김홍섭의 정신을 자극한 지적 계기가 있었다. 영국의 문인 체스터턴(G.K. 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의 글이었다. 그의 「가톨릭의 역사에 대한 수득을 통해서」는 김홍섭을 매료시켰다. 20세기 초 시인이자 수필가, 소설가로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체스터튼은 원래 철저한 회의론자로서 가톨릭을 비판하던 이였다. “천주교인이 될 바엔 차라리 식인종이 되겠다”고 극언했지만 마침내 가톨릭으로 귀의한 이였다. 하느님은 일상적이고 현상적인 곳에 계시는 분이며, 공동체 의식 속에서 신앙적 확신을 찾게 되었노라고 고백한 그에게 교황 비오 11세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김홍섭은 타인의 설득이 아니라 홀로 깊은 사색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로써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가 나중에 암시한 바에 따르면 체스터튼의 개종에서 자신도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게 분명해 보인다.

가톨릭은 어째서 진실하다고 말하는가? 피란지 부산에서 영도 바닷가를 거닐며 끊임없이 자문하던 그에게 어느 순간 빛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가톨릭에는 동(動)과 정(靜), 육(肉)과 영(靈)을 고루 달래주고 정화시켜주는 힘이 있다!  정녕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아다니던 참 종교가 아닌가!

전란을 피해 잠시 몸을 두던 곳 바닷가의 봄바람을 타고 날아온 신앙의 씨앗이 김홍섭의 품을 찾아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음 바닥에 떨어진 그 씨앗이 언제 덤불을 헤치고 푸른 잎을 틔우게 될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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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영세하다




1953년 9월 27일 한국 순교 복자 축일이 밝았다. 초가을 맑은 아침 햇살이 서둘러 창문으로 들어와 온 집안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서소문 근처 김홍섭 판사의 관사에서는 늘 조용하던 다른 날과 달리 들뜬 분위기가 있었다. 온 가족이 아침부터 채비하느라 바빴다. 열 살 전후한 세 아이는 마냥 좋아라 이 방 저 방 몰려다니며 까르르 대고 있었다. 김홍섭은 고무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자, 얘들아 이제 가야지. 누가 제일 먼저 나가나 볼까?”

김홍섭의 목소리는 유난히 밝고 드높았다. 새날을 맞이하는 기쁨이 그의 온몸에서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세 날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는다. 명동성당을 향해 길을 나섰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앞서가는 아들을 따라 노부모도 걸음을 옮겼다. 일찍이 개신교 신자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양친은 아들의 가톨릭 귀의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주었다. 

“홍섭아, 네가 한 결정이니 우리는 그대로 따르마. 믿음은 온 식구가 같이 가야 하는 길이니 우리도 기쁘다!”

한 치 어김없이 살아온 판사 아들이 내린 결정이니 의혹이 있을 리 없다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김홍섭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이제부터 가는 길은 김바오로가 걷는 구도의 걸음이 될 것이다.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하여 예수님 앞에 무릎 끓은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 그의 앞에는 예수님만이 있을 것이라고 김홍섭은 확신했다.

▲ 속초 동명동성당 앞에선 김홍섭.




김홍섭이 가톨릭 입교를 결정하고 영세하기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면서 피난 시절을 마친 정부는 환도하여 바야흐로 전쟁 복구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시작한 터였다. 바로 몇 달 전인 3월 고등법원 판사로 승진한 김홍섭도 가족들과 상경해 서대문 관사에 짐을 풀었다. 부산에서 피난살이 하는 동안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 넷째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어린 아이들과 노부모를 모신 가장이었지만 변변한 집 한 채 있을 리 만무했다. 청렴하기로 호가 나 있었던 김 판사의 사정을 알고 당시 고등법원장이 관사를 대신 쓰라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살림을 다 풀기도 전에 김홍섭이 제일 처음 한 일은 명동성당을 찾는 것이었다.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었다. 가톨릭 신자로 성당 안으로 들어가 남들처럼 천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었다.

김홍섭은 당시 명동성당 주임 사제인 장금구(요한 크리소스토모, 1911~1997) 신부를 찾아 상의했다. 

“신부님, 가톨릭 신자로 살고 싶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김홍섭의 문의는 일종의 신앙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임 사제는 김홍섭이 아주 잘 준비된 신자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본 것에 불과했지만 장 신부는 그 어떤 예비신자보다 김홍섭의 신앙관과 구도관이 철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을 찾아 김홍섭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금세 알아본 것이다.

“형제님, 아무 염려 마시고 곧장 영세하십시다!”

김홍섭은 기꺼이 자신을 받아들여 교리기간을 단축시켜 준 장 신부의 결단을 ‘대범한 찰고’라며 내내 고마워했다. 「교리 문답」 320문항의 첫 번째 질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는 김홍섭이 오랫동안 숙고해 왔던 바로 그 문제가 아니었던가!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나이다.’ 그 대답은 김홍섭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죽는 존재일 리가 없는 것이다.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구령을 하여 천주께 돌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반드시 어떻게 할 것이뇨?’

“사람이 반드시 천주교를 믿고 봉행할지니라, 바로 그것임을 제가 알겠습니다!”



김홍섭은 소리 내어 외치고 싶었다.



세례 날 명동대성당에 들어서며 김홍섭은 자신이 참으로 진교(眞敎)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지난 순례의 길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개신교와 불교가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한 중요한 안내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있었다. 부산 중앙성당이다. 피난 시절에 가톨릭에 대한 의문을 풀게 해 준 중요한 곳이었다. 중앙성당은 용두산공원으로 가는 길 바로 옆에 있었다. 어느날 김홍섭은 매일 법원 출퇴근 길에 늘 눈길이 가던 그 성당으로 찾아가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가톨릭에 대한 의문을 좀 더 가까이서 풀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피란 신자들로 북적대는 성당은 시골 장터 같기도 했고 바로 지척에 있는 자갈치시장만큼이나 번잡스러웠다. 중앙성당은 원래 1937년에 일본인 사찰인 ‘지은사’로 지어졌다가 해방 후 천주교에서 불하받아 대웅전을 개조한 후 1948년 성당으로 새롭게 축성한 건물이었다. 김홍섭은 생각했다. ‘절에서 성당으로 바뀐 이 공간처럼 불교에 한참 머물러 있던 나도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김홍섭이 중앙성당에 첫 걸음을 했던 그 때에도 그는 본당 사제에게 면담을 요청했었다. 당시 중앙성당의 주임 사제는 서른 중반의 부리부리한 눈매를 한 장병룡(요한 사도, 1917~2010) 신부였다. 그는 생전 처음 성당을 찾아온 ‘외인’ 김홍섭을 열린 마음으로 대해 주었다. 김홍섭은 마리아 공경이니 교황의 지배니 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퍼부으며 ‘고집 센 가톨릭 혐오병자’ 같은 태도를 보였지만 장 신부는 하나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진지하고 차근차근하게 설명해 주었다. 

김홍섭은 중앙성당에서 가톨릭을 단지 개인 신앙의 차원에서만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행동하는 가톨릭, 살아 움직이는 신앙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신부님, 우리 애가 열이 많이 나요. 어쩌면 좋아요?”

“자매님, 걱정하지 마세요. 성모님께서 보살펴 주실 겁니다. 어서 메리놀 병원으로 데리고 가봅시다.”

피란지 성당의 주임 장 신부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일이 많았다. 

전란을 피해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 신자들의 양식과 잠자리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성당을 통째로 내어 놓았는데, 하느님의 집은 진정 모든 이들의 거처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단을 펄럭이며 바삐 움직이는 장 신부를 보며 김홍섭은 천주교에서 강조하는 ‘인간 구령’과 ‘자선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믿으면 구원’ 이라는 개신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가톨릭에서는 구원이 선한 행위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었다. 

피란 신자들의 모습도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고단한 피란지 생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었다. 동족상잔의 비극,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마치 자신들의 신앙을 단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임시 수도 부산의 중앙성당, 당시 한국 천주교의 중심지였던 그곳에서 김홍섭은 가톨릭에 대한 마음을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 영세 후 혼배.




명동성당의 세례식장에 문답 소리가 울려 펴졌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김홍섭은 온 숨을 다해 대답하였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바오로에게 세례를 줍니다.”

김홍섭의 이마에 성수가 흘러내렸다. 참 생명의 물이다. 그의 갈증을 단번에 해소해주는 참 생명수였다. 곁에 선 대부 최 베드로가 이마를 닦아 주었다.

“아멘!” 

김홍섭에 이어서 아내 김자선 엘리사벳이 대답하였다. 노부모는 요셉, 마리아로 이름을 받았다. 맏딸아이 철효 골룸바, 정훈 베드로, 금효 아녜스, 그리고 품에 안긴 난효까지 발바라로 영세하였다. 그는 온 가족을 둘러보았다. 박봉에 시달리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언제나 양식 걱정을 해야 하는 식구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김홍섭이 애닳아 한 것은 육신의 배고픔이 아니었다. 영혼의 주림을 언제 풀어낼까, 그것이 걱정이었던 것이다. 이제 모두 천주 대전에서 무릎 꿇고 나란히 영원한 양식을 받아 모시게 되었으니 죽을 때 까지 배고픈 일은 없을 것이다. 

“주여 제가 이제 가난을 면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주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니 평생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김홍섭은 높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주께 감사드렸다. 이날부터 12년간 지상에서 신앙의 밭을 일군 하느님의 일꾼 김홍섭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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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 학창 시절의 김홍섭.




김홍섭은 1915년 8월 28일 전북 김제군 수류면 금산리에서 아버지 김재운과 어머니 강재순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선대부터 임실에 터를 잡고 살았으나 집안 중에 세금징수직을 맡아 일하던 이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바람에 일가친족 전부가 가산을 몰수당하게 되었다. 그 후 온 집안이 금산으로 옮겨왔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어 부친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금산리 원평 마을, 그중에도 홍섭의 집은 바로 큰길가에 있었다. 전주로 나가는 네거리 옆으로 마방이 있어 옛날에는 말과 마차들로 붐볐지만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화목차 같은 것도 자주 보이게 되었다. 금이 나는 곳이라 하여 김제라는 지명이 붙은 이 지역은 또한 손꼽히는 곡창지대 김제평야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홍섭이 태어나던 시절 그 넓은 들에서 거두어들이는 볏섬은 나라 잃은 농민들의 몫이 될 수 없었다. 일제의 수탈과 압박으로 숨 막히던 시절이었다.



김홍섭은 부모가 혼인한 지 여덟 해 만에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김홍섭이 아파서 결석하게 될 것 같으면 십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줄 정도였다. 자신은 가난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아들에게는 그 설움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다짐이었던 것이다. 

▲ 1940년 8월 조선 변호사 시험 합격자들과. 가운데줄 왼쪽 끝이 김홍섭.




보통학교 입학 전부터 개신교 신앙을 접했던 김홍섭에게는 동시에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바로 한학과 자연의 세계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김홍섭은 조부 김광언의 가르침을 아주 잘 받아들였다. 원릉 참봉을 지낸 분으로 학문이 깊었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한학은 물론 천지의 이치와 자연의 순리까지 두루 넓게 알게 해주었다. 조부의 가르침에 대해 김홍섭은 나중에 이렇게 기억했다.

“나의 조부는 정심성의, 즉 사람의 가죽을 쓰고서 거짓을 따를 수 없어야 하며 뿐만 아니라 그런 마음을 먹어서도 안 된다는 내 윤리관의 기초를 닦아준 분이다.”

여름밤이면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북두칠성과 삼형제 별자리 등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이 세상이 얼마나 크고 무궁한지를 알게 해주었다. 이때부터 김홍섭은 천문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천체도와 망원경은 그가 평생 성경책과 더불어 필수로 지니고 다니던 물품이 되었다.

별과 더불어 어린 김홍섭의 마음을 키우는 데는 풀이나 꽃이 있었다. 봄마다 또래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꽃싸움이나 풀놀이를 하였는데 꽃이나 풀을 가짓수대로 뜯어와 겨루는 놀이였다. 김홍섭은 아이들과 놀이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시든 꽃잎이나 풀들을 모아가다 꽃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한낱 작은 것들이라도 생명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김홍섭의 고향 마을 어귀에는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 거목의 그늘은 동네 사람들이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마당이 되기도 했고, 아이들이 모여 돼지 오줌보로 공놀이를 하는 동네 운동장이 되기도 했다. 때로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김홍섭은 언제나 저만치 떨어져 앉아 책을 보는 아이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김홍섭은 공부 잘하고 책 많이 읽는 아이, 착하고 성실한 아이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김홍섭이 집안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형편이 조금만 되었어도 가까운 지역의 농림학교로 자식들을 보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1년 정도 김홍섭은 나뭇단을 지고 아버지를 도와 일했다. 

그런 어느 날 김홍섭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오수에서 사는 고모부의 도움으로 집안이 그곳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부친에게는 물레방앗간 일자리가 생겼고 홍섭에게는 일본인 송기(마쯔야끼)가 운영하는 약방의 점원 자리가 났다. 

김홍섭은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가게 일은 물론이고 주인집의 허드렛일, 심지어 아기 보는 일까지 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싫은 내색 없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 그 대신 짬 날 때마다 책을 들여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둥에 기대선 채 책을 읽었고 밥을 먹을 때라도 읽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이구, 저기 홍섭이 좀 봐라. 저렇게 책을 열심히 읽고 있네. 길을 걸어가면서 읽고 있잖아. 도랑을 건널 때도 책을 보네!” 



진학하지 못한 김홍섭에게 책은 가장 확실한 길잡이며 가장 훌륭한 스승이기도 했다. 책 속에서 홍섭은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다. 특히 링컨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았다. 켄터키 시골에 살던 가난한 링컨이 통나무를 베면서도 틈틈이 법전을 꺼내 보며 공부했다는 대목에서 김홍섭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해 보았다. 특히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들에게 변호사는 선망의 직업이었다.

김홍섭과 같은 해에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성적이 좋은 것을 보자 나의 아버지는 일본 사람의 세상에서도 그저 무던히 살게 하려면 판사나 검사 같은 것이 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꼭 법과를 가라고 하셨다.’ 

당시 어른들의 생각이 일반적으로 그러했지만 김홍섭은 남의 말이 아니라 스스로 결심하고 결정했다. 10대 청소년 김홍섭은 중고 법전을 구해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던 그가 어느 날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수를 벗어나 대처인 전주로 향했다. 전주에서는 마침 같은 고향 사람 조남석 변호사가 사무실을 열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김홍섭은 일본인 구영(히사나가) 변호사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김홍섭은 일본인 변호사에게 정중히 절을 한 후 청을 했다. “급료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법률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 제게 일자리를 주십시오.”

조선인이라면 쉽게 경멸하고 능력을 의심하는 일본인들이었지만 김홍섭의 사람됨을 알아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구영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김홍섭은 성실하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꾸준히 자신의 길을 탐색했다. 그 시기에 난 공고를 보고 군산 지방법원 서기 시험에 응시하여 어렵지 않게 합격할 정도의 실력을 닦았다. 그 후 법원에 들어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근무도 해 보았지만,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김홍섭은 결코 자신의 꿈을 낮추지 않았다. 변호사에 자신의 목표를 이미 정하고 있었던 그는 일본에 가서 본격적으로 법 공부를 하고 싶었다. 경제적인 형편이 가로놓여 있었지만, 전주에서 알게 된 친구 오평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화순에서 가까운 지역인 동복 출신인 만석꾼의 아들 오평기는 이 시절부터 김홍섭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어가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1939년 봄 김홍섭과 오평기는 동경의 니혼 대학에 함께 입학하였다. 둘은 같은 하숙집에서 서로 격려해 가며 변호사 공부를 했지만, 김홍섭이 언제나 더 열심히 했다. 오평기가 이런 불평을 할 정도였다. “홍섭이, 자네는 도대체 언제 잠을 자는가? 내가 오늘은 기어코 자네보다 늦도록 공부해야지 하면서 지켜보았지만 언제나 내가 먼저 잠을 자고 말게 되더구먼. 아무리 해도 자네한텐 못 당하겠어. 정말 대단한 친구야, 존경하네!”

김홍섭은 불기도 없는 차가운 다다미방에서 주전자에 떠다 놓은 물을 들이키며 공부에 일로 매진했다. 그리고 법과대학 1년 만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당시 경성에서 치러진 법관 시험의 경쟁률은 대단히 높았다. 1940년 조선에서 있었던 마지막 사법시험이라고 알려진 이 시험에 무려 600여 명이 응시하여 단 18명만이 통과하였다. 합격자 명단에는 김홍섭과 오평기, 그리고 해방 후 함께 검사로 일하게 된 조재천도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 시험 합격 후 김홍섭은 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욕구가 그를 일본에 잡아두었다. 김홍섭은 와세다 대학 문과에 청강생으로 등록하였다. 그 공부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잃어버린 조국이지만 그 속에서 변호사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김홍섭은 그리운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법률가로서의 삶이 펼쳐질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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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조국에서 법률가의 첫발을 내딛다


▲ 김홍섭과 부인 김자선, 김홍섭의 어미니(가운데).


“판사 검사 다 때려죽여! 재판소도 부숴버려!”

“공산당 만세!”

 

1946년 7월 29일 ‘조선 정판사 위폐 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날, 법정 밖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방청객으로 몰려든 공산당원들이 적기가를 높이 부르고 삐라를 날려대고 있었다. 공산당 간부들이 위조지폐를 찍어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을 두고 그들은 허위 날조된 사건이라며 재판을 방해하려고 난동을 부렸다. 정판사 사건은 정치적으로 보나 규모로 보나 우리나라 형사재판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첫 공판에서 1심 판결까지 재판이 33회나 열렸다. 무장 경찰이 경호에 나섰고 그 와중에 3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등 재판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

해방 직후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한 이 사건은 또 당시의 검사로서 그 재판에 참여한 김홍섭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변호사 시험 동기인 조재천 검사와 함께 정판사 사건을 맡은 김홍섭은 엄정하고 공평무사한 태도로 재판에 임해 세간에 깊은 인상을 새겨놓았던 것이다. 좌ㆍ우익의 엇갈린 주장과 공격으로 바깥은 시끄러웠고 법정 안은 사건 관련자들이 진술을 거듭 번복하면서 재판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검사 김홍섭을 힘들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미군정청의 외압이었다. 이때 김홍섭은 다른 사건에서 경제 단체의 두 인물을 소환하여 심문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런데 미군 장교가 김홍섭을 찾아와 그들에 대한 조사를 그만두라는 압력을 넣으면서 불응할 경우 불이익을 각오하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46년 9월 24일 자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지난 19일 돌연 사표를 제출한 김홍섭 검사 문제를 싸고 사법당국 내에 긴장이 흐르고 있다. 검사국은 회의를 열어 검사의 직권 행위를 보장하고 검사 무시와 법의 위신을 훼손한 배후 인물을 엄중 처벌할 것을 미군 사법부 코넬 소좌에게 건의하고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검사 총사직으로 항거할 것이라고 밝혔다.’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은 외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미력한 조국이었다. 김홍섭은 생각했다. 검사의 온당한 권한이 보장받지 못할 바에야 사법부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법은 그 자체로 온전히 서 있어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는 정치권력에 휘둘리는 법이란 무의미하다고 보고 사표를 던졌고 그의 행동은 동료 검사들을 일깨워 총사퇴 결의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법부의 위상을 뒤흔드는 것은 권력층만이 아니었다. 정판사 사건 재판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검사 관사에 몰려와 돌멩이를 던지고 가족까지 위협했다. 김홍섭도 며칠간 몸을 피해 있어야 했을 정도였다. 결국, 김홍섭은 검사직에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검사로서 법조계에 들어설 때 자신이 머뭇거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그전부터 김홍섭은 법조계 입문이 그저 하나의 생활 방편이 아니었던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하 보신책으로 법조계를 택했지만 내가 그 은덕을 입은 것은 단발령일 때 자유업을 내세워 따르지 않을 수 있었던, 그 정도였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변호사로 지내던 그가 해방 조국에서 굳이 검사직을 맡은 것은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홍섭이 일본에서 돌아온 1941년, 그는 아직 망국 지식인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막막하던 당시 가인 김병로와의 만남이 그를 이끌었다. 니혼 대학의 대선배이기도 한 애국 법률가 가인은 독립 운동가를 비롯하여 동포들을 위한 헌신적인 변호 활동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가인의 주선으로 김홍섭은 서울 안국동 근처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주로 동포들의 무료 변론을 맡았으니 변변한 수입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가운데도 김홍섭은 법률뿐만 아니라 문학과 종교까지 두루 섭렵하며 깊은 사색의 세계를 내면에 키우고 있었다.

이때 김홍섭을 ‘놀라운 청년 법률가’라며 매우 아끼던 가인은 결국 중매에까지 나섰다. 상대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 주필에서 물러나 있던 낭산 김준연의 집안이었다. 낭산은 훗날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법무장관을 지내기도 했었다. 고하 송진우까지 적극적으로 나선 터라 김홍섭과 낭산의 막내딸 김자선은 광복 한해 전 1944년 7월에 혼인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 장인과 김홍섭.



그리고 이듬해 8월 15일 일본이 물러가고 조선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국제 정세의 거대한 변화 흐름을 타고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이었다. 새로운 조국의 현실 안에서 김홍섭은 고민했다. 과연 법률가의 길을 계속 갈 것인가? 그의 마음속에는 법이 아닌 다른 길을 찾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했다. 당시 동료 변호사 양회경에게 김홍섭은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제 내가 가진 법률 서적들을 모두 내다 팔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네.”

“아니, 자네 왜 그런 말을 하나?”

“내가 법률가로 일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일제에 시달리는 동포들을 위해서였네. 이제 조국이 해방되었으니 그 일은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하지만 김홍섭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새로이 탄생한 조국은 그에게 응분의 노고를 요구했다. 독립 국가로 출범할 대한민국 사법부의 초석을 놓고 그 기반을 다지는 일에 김홍섭은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홍섭은 1945년 10월 서울 지방검찰청 검사로 발령받아 법조계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랬던 김홍섭은 결국 혼란한 현실 속에서 수사권 독립과 검사직에 대한 회의 때문에 한계를 느끼고 물러나기로 했지만, 검사로서의 마지막 임무였던 정판사 사건의 구형 공판 논고에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이번 사건으로 좌ㆍ우익이 한층 소원하여지는 감상을 주는데 이는 시민의 한사람으로, 민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법률가 입장에서는 형사 사건이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조선의 기근이요, 민족적 비극으로 본다.”

김홍섭은 특히 위폐 제조 기술 업무를 맡았던 한 피고인을 가리켜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넘긴 가롯(이스카리옷) 유다의 비극’을 생각하게 한다며 역사의 급류에 휘말린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인간적인 상념을 표시했다. 당시 사회 여론은 반대파에 대해 여지없이 공세를 퍼붓는 분위기였는데 놀랍게도 좌우익 어느 쪽에서도 김홍섭 검사에 대해서는 토를 다는 이가 없었다. 김홍섭은 검사이기에 앞서 당대 최고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이미 성과를 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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