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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언제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관리자 2012-09-27 조회  2306

언제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김성은 베드로

 

 15년 전 난생 처음 구치소에 들어갔습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고,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기 전에 신학생 현장 체험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치소에 대한 첫 느낌은 무서움이었습니다. 여러 개의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신부님을 따라 작은 방에 들어가 사형수와 함께 미사를 드렸습니다. 마지막 사형 집행이 이뤄졌던 1997, 그때 만났던 사형수들을 지금은 사제가 되어 다시 만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의 일과는 봉쇄 수도원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성무일도를 바치고, 피해자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시간에 맞춰 낮 기도와 저녁 기도를 드리고 묵상하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 감동적입니다.

 

교정사목을 담당하는 사제로서 후원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본당에 나가면 신자들이 묻습니다. “신부님, 세상에 도와줘야 할 사람이 많은데 왜 감옥에 갇힌 죄인들을 도와줘야 하나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옥에 갇힌 이들의 죄가 정말 그들만의 문제일까 반문하게 됩니다. 과연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의 책임은 없을까요?

두 아이가 도둑질을 했다고 칩시다. 한 아이는 물건을 훔쳤고, 다른 아이는 망을 봤습니다. 주범과 공범이지요. 그럼 누가 훈방되고 누가 소년원에 갈까요? 상식으로 생각하면 도둑질한 아이가 소년원에 가고, 단순히 망 본 아이는 집으로 가겠지요. 그런데 법적 기준은 범죄자가 미성년자일 경우 부모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부모가 있으면 도둑질을 해도 훈방되고 부모가 없으면 망을 봐도 소년원에 갑니다. 망 본 아이가 소년원에 가는 순간 새로운 상황을 맞습니다. 망 본 것은 잘못이지만, 부모가 없는 것은 죄가 아니기에 사회에 불만을 품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잘못을 바로 잡으면서 품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그만큼 허술합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은 모두 죄인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를 영어로 옮기면, ‘(sin)’ 또는 크라임(crime)’입니다. 신은 종교나 도덕상의 잘못이고, 크라임은 법률상의 잘못으로 구분됩니다. 그럼 감옥에 갇힌 이들은 모두 죄인일까요? 영어 표현대로 하자면 그들은 현행법을 어긴 죄인입니다. 그렇지만 종교나 도덕상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도 죄인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현행법을 어기고 삽니다. 단지 걸리지 않아서 감옥에 갇혀 있지 않을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도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격하게 반발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말로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적이 없었습니까? 모두 한 번쯤은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짓지 않은 척하고 교만하게 사는 사람보다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사람을 더 떳떳하게 보십니다.

우리의 편견은 감옥에 갇힌 사람이 모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10년을 사형수로 사시는 분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형수가 되어서야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형수가 안 되었으면 평생 하느님을 모르고 온갖 악행과 독을 품고 살았을 텐데요.”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행스럽게 좋은 부모를 만나 사랑받고 좋은 환경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지만, 유영철, 강호순, 김길태 등 흉악범은 자란 온 환경이 건강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자랐다면 그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실 교도소에는 극악무도한 흉악범보다 경제사범이 더 많습니다. 20-30년 동안 중소기업을 성실하게 경영한 사업가도 기업이 부도나면 순식간에 사기꾼이 됩니다. 그에게 수의를 입혀 놓으니까 죄인이지 따져 보면 저보다 인격적으로 훨씬 훌륭하고 많이 배운 사람입니다. 출소하면 다시 죄를 짓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 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만입니다. 감옥 밖에 있으니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저런 쳐 죽일 놈과 계란프라이 두 개에 담긴 사랑

최근에 서울구치소 여사(여자 수용소)에서 열여덟 살의 앳된 여자아이를 만났습니다. 아이는 소년분류심사원(법원소년부 결정으로 위탁한 소년을 수용하여 자질을 분류·심사하는 시설)으로 가기 전의 미결수였습니다. 교도관에게 물어 보니 아이가 저지른 범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한 여자아이를 집단으로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했는데, 남자아이들이 집단 윤간을 할 때 망을 봐 줄 정도로 심각한 죄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미사 시간에 본 아이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건드리지 마세요. 미사나 하고 가세요하는 눈빛이었습니다. 뭘 물어 봐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가 되어 미사를 드리고 평화의 인사를 하는데 왠지 마음에 걸렸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너 요즘 뭐가 제일 먹고 싶니?” 하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뜻밖에도 계란프라이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덧붙여 케첩 많이 뿌려 오세요하고 당부했습니다. 저는 계란프라이를 꼭 싸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계란프라이를 가지고 구치소나 교도소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미사 가방에 계란프라이 두 개를 넣고 구치소에 들어갔습니다. 정말 싸 올 거라고 믿지 않았던 아이는 계란프라이를 보고 좀 당황하더니 이내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이를 세 번째 만났을 때 아이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지금 아이는 보호 처분을 받고 보호 시설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이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우선 제가 보고 싶고 자기는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날 계란프라이를 먹고 난 뒤 재판을 받으면서 많이 반성했고, 자기가 지은 잘못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일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이의 분노와 독기 어린 마음이 녹아내린 것 같았습니다. 계란프라이에 담긴 사랑이 예민한 열여덟 살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저런 쳐 죽일 놈!”이라고 말할 때, “왜 그랬을까? 왜 저 지경까지 갔을까?” 하고 죄 지은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며 손잡아 줄 때, 그가 비로소 회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성폭력과 살인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범죄자를 사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엄청난 고통을 겪는 피해자 가족을 위해서라도 꼭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네 딸이 성폭행을 당해 살해되었다고 생각해 봐. 당연히 죽여야지.” 사형이 정말 피해자 가족을 돕는 것일까요?

피해를 본 가족은 처음에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다음 엄청나게 분노합니다. 범죄자를 향한 분노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분노가 더 큽니다. 사건 현장에 폴리스 라인이 쳐지고 현장 검증이 끝나면 경찰은 그냥 가 버립니다. 온통 어지럽혀진 집에 피해자 가족만 덜렁 남습니다. 분노의 끝에서 그들은 결국 삶을 체념합니다. 내팽겨진 채 사회의 돌봄을 받지 못합니다. 저희 사회교정사목위원회에서는 피해자 가족을 위한 모임을 갖습니다. 그들 중에는 살인자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저희는 그들과 함께 울고 아파하면서, 그들의 입에서 용서한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용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내가 덕이 높기 때문에 잘못한 것에 대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나에게 잘못하면 내 마음 안에 분노가 쌓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분노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하기 전까지 절대 용서 못 해.” 용서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용서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죄에 대한 형벌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을 언급하는 복음(마태 25,31-46 참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35-36). 그분은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당신의 형제들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35,40)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감옥에 갇힌 죄인을 사회의 약자로 보신 것입니다. 그분처럼 죄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마음이 용서의 시작이 아닐까요?

 

우리나라 교정 행정이 여전히 교화가 아니라 격리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정신이 병들어 감옥에 갇힌 이들을 고쳐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문심리상담사를 고용해 심리 치료를 하는 데 정부 예산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 수준도 다를 바 없습니다. 출소자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범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이율배반의 모습입니다. 성숙한 사회적 장치와 합의를 이루지 않고 무책임한 욕설만 쏟아내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일까요?

신앙인만이라도 왜 죄 지은 사람들까지 돌봐야 하는가라고 여기기보다 무엇이 그들을 죄 짓게 했을까, 그들이 왜 죄인이 되었을까라고 생각했으면 합니다. “신부님, 저는 사람을 죽인 죄인이에요. 왜 이렇게 자꾸 찾아오세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 말에 저는 왜 그러긴요. 미안해서 그러지요라고 대답합니다. 한 사람에게 죄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함께 나누어 질 때,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가 이 세상에 가득 퍼질 것입니다.

 

<구술 정리 : 이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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